도시의 소음이 잦아들고, 나른한 오후의 햇살이 창을 스며들 때면 문득 그리워지는 맛이 있다. 그건 단순히 허기를 채우는 음식이 아니라, 마음까지 따뜻하게 감싸주는 추억 한 조각 같은 것이다. 오늘, 나는 서울의 한적한 골목길에서 그런 소중한 순간을 만났다. ’88경양식’이라는 이름표를 단 이곳은, 겉모습에서부터 오랜 시간의 깊이가 느껴지는 곳이었다. 낡은 듯 정갈한 외관은 마치 오래된 앨범 속 사진처럼, 추억을 소환하는 묘한 힘이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은은한 조명과 함께 잔잔한 음악이 나를 맞았다. 테이블마다 놓인 작은 소품들과 빈티지한 인테리어는 편안하면서도 아늑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온 듯한 기분이랄까. 벽면에 걸린 낡은 액자들은 이곳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발길을 거쳐왔는지 웅변하는 듯했다.
자리에 앉아 메뉴판을 살펴보는 동안, 코끝을 간지럽히는 고소한 냄새가 식욕을 자극했다. 어떤 메뉴를 선택해야 할지 행복한 고민에 빠질 때쯤, 테이블 한쪽에 마련된 셀프 코너에서 따뜻한 스프와 바삭하게 구워진 빵이 눈에 들어왔다. 음식 준비가 되는 동안, 이 스프로 가볍게 입맛을 돋우기로 했다.

따뜻하고 걸쭉한 스프는 부드럽게 목을 타고 넘어갔고, 빵은 겉은 바삭, 속은 촉촉하여 스프에 찍어 먹으니 환상적인 조화를 이루었다. 이 작은 배려가 식사 전부터 마음을 훈훈하게 만들었다.
오늘의 선택은 ‘반반’ 메뉴. 히레까스와 치즈까스를 한 번에 맛볼 수 있다는 점이 매력적이었다. 주문을 마치고 잠시 기다리는 동안, 주방에서 들려오는 정겨운 칼질 소리와 튀김옷 입히는 소리가 마치 한 편의 요리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했다. 갓 튀겨져 나오는 돈까스의 풍미는 이미 상상을 초월했다.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반반’ 메뉴가 나왔다. 거대한 접시 위에는 먹음직스러운 히레까스와 치즈까스, 그리고 갓 지은 밥과 신선한 샐러드가 보기 좋게 담겨 있었다. 겉은 황금빛으로 바삭하게 튀겨졌고, 그 위로는 진한 소스가 짙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먼저 히레까스 한 점을 집어 입안에 넣었다. 겉의 바삭함 뒤로 느껴지는 부드러움과 풍부한 육즙은 그야말로 예술이었다. 씹을수록 고소한 풍미가 입안 가득 퍼지는데, 마치 잘 숙성된 보쌈을 먹는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함께 나온 새우젓과 곁들여 먹으니, 예상치 못한 조합이 선사하는 새로운 맛의 세계가 열렸다.

다음은 치즈까스. 치즈까스는 두말하면 잔소리일 것이다. 겉을 살짝 베어 물자, 뜨거운 치즈가 마치 폭포수처럼 흘러내렸다. 쭉 늘어나는 치즈의 풍미는 풍성했고, 고소한 돈까스와의 조화는 남녀노소 누구나 사랑할 만한 맛이었다. 짭조름한 소스와 치즈의 부드러움이 입안에서 춤을 추는 듯했다.

이곳의 진정한 매력은 단순히 메인 메뉴에만 있지 않았다. 사이드로 함께 나온 수제 카레는 그 자체로 하나의 요리였다. 카레 특유의 향신료 향과 깊고 진한 맛이 어우러져, 돈까스와는 또 다른 풍성한 맛을 선사했다. 카레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분명 열광할 만한 맛이었다.

그리고 놀라웠던 것은 서비스로 나온 듯한 에비후라이와 가케우동이었다. 메인 메뉴 못지않은 훌륭한 퀄리티를 자랑했다. 통통한 새우튀김은 튀김옷이 얇고 바삭했으며, 속살은 부드럽고 탱글탱글했다. 짭짤하면서도 감칠맛 나는 소스와 함께 먹으니, 어느 고급 일식집 부럽지 않은 맛이었다.

무엇보다 이곳의 ’88경양식’의 가장 큰 미덕은 바로 ‘양’이었다. 접시를 가득 채우는 푸짐한 양 덕분에, 한 끼 식사로 충분한 만족감을 느낄 수 있었다. 돈까스의 튀김옷은 눅눅해질 틈 없이 바삭함을 유지했고, 속살은 부드럽게 씹혔다. 밥 한 톨, 샐러드 한 잎까지 모든 것이 조화롭게 어우러져 잊지 못할 식사의 경험을 선사했다.
식사를 마친 후에도 왠지 모를 아쉬움이 남았다. 맛있는 음식 덕분에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는 생각에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다음 방문에는 또 어떤 메뉴를 맛봐야 할지 벌써부터 기대가 되었다.
서울이라는 도시는 수많은 맛집들의 각축장이지만, ’88경양식’은 그중에서도 특별한 울림을 주는 곳이었다. 단순히 음식이 맛있어서가 아니라, 그곳에 담긴 정성과 시간, 그리고 따뜻한 마음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오랜 시간 변함없이 자리를 지켜온 이곳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맛집’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입안 가득 남은 풍미처럼, 이곳에서의 기억은 오래도록 나를 머물게 할 것 같다.